제 현장도 제 직종도 아니었습니다

2026-08-24

인테리어 상담에 쓰려고 견적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서 썼습니다. 항목마다 자재비와 인건비를 넣어 두고 범위를 고르면 금액이 나오는 정도입니다. 그 안의 인건비 단가는 대부분 현장에서 직접 치러 본 금액이었습니다. 이 값들이 지금도 적정한지 점검받고 싶어져서 AI에게 물었습니다.

자료는 정확했습니다

AI는 대한건설협회가 내는 2025년 상반기 건설업 시중노임단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넣어 둔 일곱 직종을 공식 단가와 나란히 놓아 주었습니다. 도장공 276,011원. 원 단위까지 떨어지는 숫자였고 출처도 분명했습니다.

한참 들여다보다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단가는 대형 공공 건설 현장을 기준으로 조사된 값입니다. 제가 다뤄 온 곳은 아파트 한 채를 고치는 작은 민간 현장이었습니다. 직종 이름만 같을 뿐 일하는 조건이 다릅니다. 소규모 민간 현장에 30에서 50퍼센트 할증이 붙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AI가 잘못된 자료를 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질문에 맞는 가장 정확한 자료로 보였습니다. 다만 그 자료가 답하고 있는 현장이 제 현장은 아니었습니다. 이 둘은 겉으로 보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출처가 흐릿하거나 숫자가 어설펐다면 쉽게 걸렀을 텐데, 정확했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 적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일곱 줄을 하나씩 봤습니다

통째로 받지도, 통째로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일곱 직종을 한 줄씩 짚었습니다. 기준으로 삼은 것은 공식 단가와의 거리가 아니라, 작은 현장에서 그 일이 얼마에 오가는지 따로 확인할 길이 있느냐였습니다.

세 직종은 값을 내렸습니다. 도장은 공식 단가를 보고 내렸습니다. 같은 자료 안에 단순 도장은 훨씬 낮은 값으로 이뤄진 사례가 함께 적혀 있었고, 그것을 보고 낮췄습니다. 인테리어 필름은 공식 단가가 아니라 시장에서 오가는 값을 다시 찾아보고 내렸습니다. 타일도 한 칸 낮췄는데, 왜 그렇게 정했는지는 그때 적어 두지 않았습니다.

한 직종은 둘로 나눴습니다. 도배를 한 칸에 묶어 두고 있었는데, 실크와 합지를 같은 값으로 계산해 온 것이 무리였습니다. 자료가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은 아닙니다.

나머지 셋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목공, 전기, 설비입니다. 이쪽은 사람을 부를 때 얼마가 오가는지 제가 직접 겪어 온 쪽이라, 표를 근거로 손댈 이유가 없었습니다. 표를 그대로 옮겼다면 프로그램은 더 그럴듯해지고 현장에서는 못 쓰는 물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넘길 수 없었던 자리

AI는 혼자서는 찾아내지 못했을 자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데 일곱 줄 중 어느 줄을 고칠지까지 정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그 판단의 근거는 어느 표에도 없었고, 현장에서 돈을 치러 본 기억에만 있었습니다.

숫자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 받은 숫자를 다시 확인해 봤습니다. 인용해 두려고 원본 보고서를 열었습니다.

도장공 줄에 적힌 값은 253,409원이었습니다. 276,011원은 그 표에 없었습니다. 다른 장에 있었습니다. 132개 전체 직종의 평균임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받은 것은 도장공 단가가 아니었습니다. 직종 하나를 묻는 자리에 전체 평균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출처는 진짜였고 자릿수도 진짜였는데, 그 숫자가 가리키는 것이 제가 물어본 직종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해 보이는 값이 실은 다른 것을 가리키는, 조용한 할루시네이션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 단가가 어느 현장을 기준으로 조사된 값인지는 따졌으면서, 이 숫자가 정말 도장공 줄에서 나온 것인지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직종 이름이 앞에 적혀 있으니 그런 줄 알았습니다.

도장 값을 내린 것은 결과적으로 방향이 맞았습니다. 전체 평균이 실제 도장공 단가보다 높았으니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옳게 읽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두 가지를 묻습니다. 이 자료가 말하는 현장이 내가 서 있던 현장과 같은 곳인가. 그리고 이 숫자가 정말 내가 물어본 그 줄에서 나온 것인가. 앞의 것은 그때도 물었고, 뒤의 것은 이번에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