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어느 신축 현장의 설비 도면을 검토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공사에 참여할 수 있을지 보려면 먼저 도면을 읽어야 했습니다. 파일을 열어 놓고 무엇부터 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펼쳐 놓고도 모르겠는 것
인테리어 현장은 오래 다녔지만 신축 건물 설비는 제가 깊이 다뤄 온 쪽이 아닙니다. 건축 도면은 원래 각 분야 사람이 자기 것만 보는 물건입니다. 기계와 소방, 전기, 통신이 저마다 따로 그려져 있었고 파일만 수십 개였습니다. 계산서와 시방서도 함께 왔습니다.
선 하나하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짚어 볼 수 있어도, 이 건물의 설비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짜여 있는지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물어보면 될 일 아니냐 하실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상대 실무자에게 처음부터 하나씩 물을 수는 없었습니다. 남의 시간을 많이 가져가는 일이기도 하고, 애초에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는지조차 스스로 정리가 안 돼 있었습니다. 갈피도 못 잡은 채 아무거나 묻기 시작하면 대화만 길어집니다.
통째로 넘겼습니다
도면 전체를 AI에게 주고 제가 알아볼 수 있게 정리해 달라고 했습니다. 요령을 부린 것은 없고 그렇게 부탁한 것이 전부입니다.
돌아온 것은 분야별로 흩어져 있던 것을 한자리에 모은 문서였습니다. 층마다 어떤 설비가 들어가는지, 어느 도면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계산서가 어떤 기준으로 뽑힌 것인지가 나란히 놓였습니다. 따로 볼 때는 한 장 한 장이 다 남의 그림 같았는데, 모아 놓으니 이 건물이 어떻게 돌아가도록 설계됐는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크게 남은 쪽
한눈에 보게 된 것도 좋았지만, 정작 도움이 된 것은 다른 쪽이었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게 된 것입니다.
정리된 문서를 읽고 나서 실무자에게 물은 것은 우리가 공사해야 하는 범위였습니다. 이 건물 설비 가운데 어디까지가 우리 몫인지를 물었습니다. 처음 파일을 열었을 때는 이 물음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있는지를 몰라 무엇을 물을지 고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음의 자리가 한 층 올라간 셈입니다.
우리 몫만 알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다른 공정의 도면도 조금씩 읽혔습니다. 우리 범위만 확인하려던 것이었는데 옆에서 무슨 일이 어떤 순서로 벌어지는지가 함께 보였습니다. 그러자 우리 일과 다른 일이 어디서 맞물리는지도 뚜렷해졌습니다. 설비는 좁은 자리를 여러 공정이 나눠 쓰는 일이라, 이걸 알고 들어가는 것과 모르고 들어가는 것은 현장에서 차이가 큽니다.
이번에는 방향이 반대였습니다
여기 적어 온 이야기는 대개 AI가 내놓은 것에서 제가 걸러 낸 쪽이었습니다. AI가 채워 넣은 장비 수치가 실제와 어긋나 있었다거나, 급할 것 없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뻔했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오래 해 온 일이 있어서 걸러 낼 수 있었던 이야기들입니다.
이번 일은 반대쪽이었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야였고, 걸러 낼 것을 찾은 것이 아니라 들어갈 문을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AI가 답을 대신 준 것은 아닙니다. 우리 공사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결국 그 현장 실무자에게 물어서 확인했습니다. AI가 해 준 것은 제가 물어볼 수 있는 상태까지 데려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모르는 분야 앞에서 막막한 것은 몰라서라기보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서일 때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