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강의안을 처음부터 쓰지 않습니다

2026-09-14

강의에서 저는 첫 답에서 멈추면 딱 거기까지밖에 못 간다고 말합니다. AI가 처음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아 쓰면, 결과도 딱 그만큼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실제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 드리려 합니다.

대단한 도구를 쓰는 건 아닙니다. 다만 어디서 제가 판단하고 어디서 기계가 반복할지를 미리 정해 두고 그 자리를 지킵니다.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이 경계를 실제로 지키는 일은 습관이 몸에 붙어야 됩니다.

강의안도 원고도 처음부터 쓰지 않습니다

이 습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건 글을 쓰는 방식입니다. 저는 강의안이든 원고든 빈 화면 앞에서 처음부터 쓰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겪은 일, 확인한 자료, 재 본 결과를 카드 한 장씩으로 만들어 창고에 쌓아 둡니다. 필요할 때 거기서 꺼내 씁니다.

창고가 쌓이는 일은 판단이 아니라서 기계에 맡깁니다. 자료를 정리하고 형식을 맞추는 일까지는 기계가 해도 됩니다. 다만 무엇을 쌓을지, 그중 무엇을 골라 어떻게 엮을지는 제 몫으로 남겨 둡니다. 창고에 쌓인 카드가 아무리 많아도, 그걸 오늘 쓸 글에 어떻게 넣을지는 매번 제가 정합니다.

이 글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여기 적힌 문장들도 어느 날 갑자기 써 내려간 게 아니라 먼저 쌓여 있던 것을 꺼내 다듬은 것입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문장을 쓰는 순간에도 같은 방식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이 보는 자리는 정해 둡니다

한 편의 글이 나오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지만 제가 직접 보는 자리는 두세 곳뿐입니다. 사실관계가 맞는지 한 번, 화면에 올라갈 최종본을 한 번 봅니다. 그 사이의 반복은 기계가 맡습니다.

그 자리를 줄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줄일 대상이 아니라 제때 물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판단이 필요한 곳을 기계에 넘기면 당장은 편해 보이지만 나중에 훨씬 크게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어디를 줄이고 어디는 절대 안 줄일지를 먼저 정해 두고 그 경계를 흔들지 않으려 합니다.

이 블로그도 같은 방식으로 쌓입니다

여기 올라올 글들도 대부분 그렇게 나올 것입니다. 강의 준비, 책 원고, 현장에서 겪은 일 — 각자 다른 자리에서 쌓인 카드들이 필요할 때 하나씩 꺼내져 글이 됩니다. 그래서 날짜 순서보다 이야기 순서로 읽으시는 편이 더 잘 읽힙니다. 쌓인 순서가 아니라 꺼내 쓴 순서니까요.

AI를 어떻게 쓰냐고 물으시면, 저는 도구 이름보다 이 이야기부터 합니다. 무엇을 쌓아 두고 무엇을 넘길지 정하는 일이 제가 AI와 일하는 방식의 거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그 경계를 얼마나 꾸준히 지키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