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 콘솔 다루는 법을 익히는 학습 앱을 만들던 중이었습니다. 장비 설정값을 정리해 둔 대목을 다시 보니, 다섯 항목 중 한 곳만 숫자 범위가 비어 있었습니다.
빈칸 하나
확인이 안 돼서 남겨 둔 것인지 그냥 빠진 것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비어 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빈칸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채워져 있는 나머지 칸들은 믿어도 되는지가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 값들을 실제 사양으로 확인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씩 맞춰 보니 채워져 있던 네 칸 중 세 칸이 실제 장비와 달랐습니다. 빈칸까지 합치면 손봐야 할 자리가 넷이었습니다. 그리고 틀린 칸 하나에는 원래 그 빈칸에 들어가야 할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자료를 옮기는 과정에서 한 칸이 밀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보면 빈칸과 틀린 칸은 서로 다른 실수가 아닙니다. 한 번 밀리면서 한쪽은 비고 한쪽은 잘못 채워진 것입니다.
틀린 값 위에 쌓여 있던 문장들
고쳐야 할 것은 숫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값을 근거로 쓴 안내 문장이 뒤에 여러 줄 붙어 있었습니다. 한 줄은 그 장비에서 애초에 넣을 수 없는 값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줄은 화면에 표시되는 방식과 반대로 적혀 있어서, 조절해야 할 방향까지 거꾸로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내려가라고 적힌 자리가 실은 올려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숫자 한 칸이 틀어지면 오류는 점으로 머물지 않고 선을 따라 번집니다. 값을 고치면서 그 값에 기대어 쓰인 문장까지 따라가 고쳐야 했습니다.
매뉴얼에 없는 것을 확인하는 법
제조사 매뉴얼의 해당 항목에는 그 숫자 범위가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정답지를 펴 놓고 맞춰 볼 방법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통신 규격을 정리해 둔 자료 한 편과, 다른 사람이 만든 별개의 프로그램을 나란히 놓고 대조했습니다. 한 곳에서 맞다고 나온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니라, 어디서도 어긋나는 데가 없는지를 본 것입니다.
고치고 끝내지 않기
한 항목을 고치고 나니 나머지가 걸렸습니다. 같은 자료에서 옮겨 온 것들이라면 거기도 성할 리가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옆 항목도 같은 방식으로 확인해 달라고 했고, 거기서도 어긋난 값이 나왔습니다. 결국 나머지 전부를 훑었습니다.
값을 다 고친 뒤에 한 가지를 더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되짚어 본 것입니다.
밀린 칸을 따라가 보니 짐작이 갔습니다. 자료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한 줄이 어긋났고, 그 뒤로는 모든 값이 한 칸씩 밀린 채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고 매뉴얼에 범위가 없던 항목에서 AI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워 두는 대신 그럴듯한 숫자를 채워 넣었습니다.
여기까지 알고 나니 고쳐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이번 숫자들은 고쳤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음 숫자가 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앱에서 수치를 다룰 때 지킬 것을 문서로 적어 두었습니다. 값은 서로 무관한 자료 두 곳 이상에서 교차 확인할 것. 확인하지 못한 값은 지어내지 말고 빈칸으로 두고 왜 비웠는지 남길 것. 값을 고칠 때는 그 값에 기대어 쓰인 문장까지 함께 훑을 것.
특히 두 번째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빈칸은 누구나 알아봅니다. 그럴듯하게 채워진 틀린 값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가 한 일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이렇게 적어 놓으니 꽤 손이 많이 간 일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한 것은 세 마디였습니다. 이 값들 실제 사양으로 확인해 달라는 말. 옆 항목도 같은 방식으로 봐 달라는 말. 그리고 나머지도 전부 훑어 달라는 말.
찾아보고, 대조하고, 값을 바로잡고, 그 값에 기대어 쓰인 문장을 따라가 고치고, 왜 이렇게 됐는지 되짚고, 다시 그러지 않도록 규칙을 문서로 정리한 일은 전부 부탁해서 된 것입니다.
세 마디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숫자를 그냥 넘기지 않은 것, 한 칸이 틀린 것을 보고 나머지도 의심한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그 값이 배우는 사람에게 어떻게 쓰일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I가 내놓은 결과가 말끔해 보이는데 한 군데가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짚어내는 일은 현장을 겪어 본 사람이 합니다.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만 하면 나머지는 맡길 수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현장을 겪어 본 사람이 AI를 잘 쓸 수 있다고들 하는데, 저는 이런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