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거의 다 썼을 때였습니다. 목차대로 장을 다 채웠고 빠뜨린 항목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 끝났다는 느낌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디가 모자란지는 모르겠는데 무언가 빠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앉을 수 없는 자리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이미 다 아는 사람입니다. 아는 사람이 읽으면 모든 문장이 말이 됩니다. 정작 이 책을 읽을 분은 인테리어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쪽인데, 저는 그 자리에 앉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AI에게 그 자리를 대신 맡겨 봤습니다. 반셀프 인테리어를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처음부터 읽어 달라고, 읽다가 막히거나 더 알고 싶어지는 데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거창하게 준비한 것은 없습니다. 그때는 작업을 기록으로 남길 생각도 못 하던 무렵이라, 그냥 대화창에 물어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초보의 눈에는 이 원고가 어떻게 보일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돌아온 답
지식은 충분한데 이대로 따라 할 수가 없다는 답이었습니다. 무엇을 언제 해야 하는지, 업체는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상황에 따라 무엇이 달라지는지가 본문 곳곳에 흩어져 있기만 하고 손에 쥘 수 있는 형태로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읽고 나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공사 순서는 제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 표로 만들 생각을 못 했습니다. 업체를 만나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도 몸에 익은 것이라 적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빈집에서 하는 공사와 살면서 하는 공사가 얼마나 다른지는 현장에서 늘 겪는 일이라, 따로 설명할 대목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너무 잘 아는 것은 적어야 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뒤에 붙인 것들
그 답에서 부록이 나왔습니다. 공사를 순서대로 늘어놓은 일정표, 업체를 만나기 전에 확인할 목록, 빈집과 거주 중을 나눠 정리한 것, 공정마다 무엇이 하자로 잡히고 어디까지 보수를 요구할 수 있는지 적은 표를 본문 뒤에 붙였습니다. 본문에 이미 있던 이야기를 다시 모은 것도 있고, 쓰면서 처음 정리한 것도 있습니다.
그것까지 붙이고 나서야 원고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얻은 것은 부록이 아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남은 것은 뒤에 붙인 표들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원고라도 어느 자리에서 읽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 그것이 그때 처음 손에 잡혔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AI에게 무엇을 시킬지만 생각했습니다. 그 뒤로는 어느 자리에서 보게 할지를 함께 생각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한 가지 일을 놓고도 계획하는 역할, 만드는 역할, 따져 보는 역할을 나눠서 맡깁니다. 그렇게 일하는 방식이 정리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고 중간에 배운 것도 많습니다. 다만 그 생각이 처음 뿌리내린 것은 원고를 초보의 눈으로 읽혀 본 그날이었습니다.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만든 것을 처음 보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눈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대개는 뒤늦게 압니다. 저는 그 자리를 한번 맡겨 보고서야 무엇이 빠졌는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