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편들에서는 AI가 내놓은 것을 그대로 믿지 않고 다시 확인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이번 편은 반대입니다. 맡겨 놓고 그대로 받아 쓴 이야기입니다.
늘어난 원고, 늘어난 어긋남
챕터를 하나씩 채워 가는 동안에는 몰랐습니다. 원고가 백 쪽을 넘어가자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전기공사라고 쓴 자리와 전기 공사라고 띄어 쓴 자리가 따로 있었고, 같은 곳을 두고 전시장이라 부르다가 쇼룸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목록에 번호를 매긴 곳과 안 매긴 곳도 뒤섞여 있었습니다.
쓸 때는 그 챕터만 보고 있어서 몰랐던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읽으면 눈에 밟혔습니다. 문제는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읽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백 몇십 쪽을 한 번에 붙잡고 앉아 같은 말을 다르게 쓴 자리를 전부 찾아내는 일은, 하려고 들면 못 할 것은 없어도 몇 번이고 놓치게 될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봐 달라고 맡겼습니다
그래서 퇴고하면서 AI에게 원고 전체를 한 번에 통일해 달라고 했습니다. 같은 뜻인데 다르게 쓴 말을 전부 찾아 하나로 맞추고, 번호를 매긴 곳과 매기지 않은 곳도 하나의 기준으로 다시 나눠 달라고 했습니다.
돌아온 결과는 전기공사와 전기 공사, 전시장과 쇼룸처럼 표기가 갈렸던 자리를 전부 찾아 하나로 맞춰 놓은 원고였습니다. 절차를 설명하는 곳은 순서대로 번호가 붙었고, 분류해서 보여줄 곳은 원문자로, 그냥 나열만 하면 되는 곳은 불릿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본문 곳곳에 있던 박스도 쓰임새에 따라 네 가지 색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놓치는 자리
제가 직접 이 작업을 했다면 몇 군데는 잡아냈을 것입니다. 다만 백 몇십 쪽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훑는 일은 다른 문제입니다. 앞에서 본 것을 뒤에서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일이고, 지루한 일일수록 사람은 중간에 집중이 흐트러집니다. AI는 지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기준으로 봤습니다. AI를 쓰면서 제 일을 대신한다는 느낌을 가장 강하게 받은 자리도 여기였습니다.
앞의 이야기들과 나란히 두면
한글이 사라진 날에도, 대본이 44분이 아니라 13분이었던 걸 알았을 때도, 제가 한 일은 AI가 내놓은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다시 짚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짚어 볼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맡긴 일을 맡긴 대로 받았고,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두 가지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이야기의 양쪽입니다. 어디서는 다시 확인해야 하고 어디서는 맡겨도 되는지, 그 경계를 아는 일이 결국 AI와 일하는 법이었습니다. 이번 일로 그 경계 한쪽을 다시 확인했습니다.